안중근 의사를 지원한 독립투사 최재형

안중근은 의병을 다시 일으킬 것을 다짐하며 최재형의 집에서 손가락을 자르는 단지동맹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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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프리즘
기사입력 2019-08-19 [09:45]

 일제가 조선침략을 노골적으로 드러낼 무렵연해주지역에서  일어난 항일독립운동은 최재형을 빼놓고서는 기록될  없을 정도로 대단한 영향력을 미쳤던 인물이었다특히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이토오히로부미 저격을 성공할  있었던 배경에는 바로 최재형선생이 있었다.

  함경도 출신인 최재형은 1860년대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가 새로운 주인이  연해주로 이민을 갔다그는 러시아 상선 선장의 도움으로 러시아 교육을 받았고선원무기 공장 노동자  각고의 고생 끝에 1900년대  제정 러시아와 일본 제국의 전쟁으로 인한 특수로 군수 산업 분야에서  돈을 벌었다그는 서른이 되기 전에 연해주 굴지의 거부가 되었고도로  막사 공사군납을 해서 벌어들인 재산은 물론이고 그의 능력과 경험을 동포사회를 위해 사용하였다.

 

  동포들이 돼지 등을 길러 군납할  있도록 했고바닷가에 사는 동포들에게는 연어를 잡아 살과 알을 납품하도록 했다동포들이 사는 마을에는 학교와 공원을 세웠다그런 최재형을 러시아 정부는 도헌(지방 정부 시장)으로 추천할 정도였고, 1907 연해주로 건너온 안중근은 “집집마다 최재형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고 기억할 정도로 동포사회도 그를 존경하였다러일전쟁에 참여한 최재형은   일본의 야욕을 간파하고 항일운동에 뜻을 두었다. 1907 안중근은 해외망명을 통해 러시아에서 최재형을 만났다최재형은 1908 최초의 독립단체 동의회를 조직하여 총장이 된다안중근은 평의원으로 참여한다.

  동의회는 러시아의 모든 항일의병 세력을 단결시켰고러시아 국경의 일본군 초소와 소규모 부대들을 격파하고많은 탄약과 소총을 탈취했다.당시 일본군은 전사자 40여명에 달했으나의병들은 부상자가 불과 4명이었다.

  결국 의병들의 러시아 활동 사실을 파악한 일본은 제정 러시아를 압박했고러시아 국적의 조선인 청년의 징집무기 수거 등으로 의병 활동을 방해했다.

 

안중근 의거를 지원

  동의회 산하 의병부대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 국내진공작전을 하는 안중근의 뒤에는 최재형이 있었다싼값에 무기를 샀고 의군의 숙식은 최재형의 집에서 했다그만큼 최재형은 군납업으로 많은 자금과  저택을 보유했다대한의군은 신아산 전투등 국내진공작전에 연전연승 하고 영산전투에서는 참패했다참패의 원인은 포로를 석방하여 대한의군의 비밀 루트가 발각된 때문이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러시아를 압박하여 최재형을 무장해제시켰다최재형은 자금난에 문을 닫게된 해조신문을 인수하여 대동공보》를 발행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안중근은 의병을 다시 일으킬 것을 다짐하며 최재형의 집에서 손가락을 자르는 단지동맹을 했다  대동공보 기자증을 가지고 활동하던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대동공보에서 최재형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 주살을 모의한다당시 하얼빈은 중국의 영토였지만 러시아가 조차해서 다스렸다하얼빈에 이토 히로부미가 오니 최재형은 이토 히로부미 사살 장소를 하얼빈으로 정해안중근은 최재형의 집에서 권총연습을 한다최재형은 안중근에게 권총을 사주고 안중근 거사  일본이 관할하지 않는 러시아 법정에서 재판 받도록 계획하고변호사인 미하일로프 주필을 안중근의 변호인으로 준비했다그러나 안중근이 1910 일본 법정의 불법재판 끝에 순국하자최재형은 자신이 안중근을 지켜주지 못했다고 자책감을 느껴 안중근의 처자들을 보호하였다.

 

   사건으로 러일 전쟁 패전국인 러시아의 연해주 조선인들에 대한 감시가 강화되었고 최재형은 권업회를 창설하여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의 음모에 따라 간첩 혐의로 체포되었다 석방됐으나러시아 정부가  이상 그와 거래 하지 않음에 따라 경제적 궁핍에 시달렸다전로한족중앙총회(全露韓族會中央總會) 명예회장으로 활동했고 1919년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고  이어 최초 임시정부였던 대한국민의회에서 외교부장을 맡았다 이후 1919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재무총장에 선임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교육가사업가독립운동가언론가  다양한 길을 걸으며 오로지 한인들을 위해 살았고 엄청난 자금을 독립운동에 쏟아부었다.

 

최후

  여건이 나빠진 최재형은 우수리스크의  초라한 집에서 지내다가, 1920 러시아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연해주에 침입한 일본군에 의해 총살당하고 말았다손자 최발렌틴은 모스크바에 살고 있으며최재형의 사진과 관련 문서를 보관하고 있다.(위키백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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